- 저자 인터뷰 - 《반도체 강국의 역설》 안흥준 저자

대한민국은 정말 반도체 강국인가. 메모리 초호황이 가져온 성공이 오히려 시스템 반도체와 팹리스 생태계의 심각한 구조적 취약점을 가리는 ‘착시 효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진단하는 책이 나왔다. 2026년 5월 20일 출간된 《반도체 강국의 역설》이다. 1996년 SK하이닉스에서 메모리 설계로 반도체에 입문한 뒤 2003년부터 2025년까지 삼성전자 메모리 사업부에서 설계·상품기획·마케팅·전략기획에 이르기까지 반도체 사업의 거의 전 주기를 경험한 안흥준 저자가, 삼성전자 퇴직 후 25년 이상 팹리스 기업을 직접 경영해 온 공저자 이효승 대표와 함께 펴낸 책이다. 현재 연세대학교 겸임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는 그는 30여 년 현장에서 체감한 문제의식을 이 책에 담았다. “어디가 잘못되었는가가 아니라 앞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함께 물어달라.” 이 한 문장이 책의 핵심을 압축한다. 반도체는 이제 미래 기술 패권과 국가 경제를 떠받치는 핵심 인프라이자 우리 삶의 일부가 됐다. 사실상 모든 세대가 함께 읽고 고민해야 할 산업 보고서다.
이 책은 우리가 익숙하게 믿어온 ‘대한민국은 반도체 강국’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실제로 메모리 분야의 글로벌 경쟁력과 달리 비메모리 점유율은 3%대로 중국의 절반 수준이고, 팹리스 설계 분야의 세계 비중은 1% 내외에 불과하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70% 이상이 비메모리임에도 국내는 메모리 중심 투자에 함몰돼 설계 생태계인 IP·EDA·검증 인프라에 대한 투자가 부족하다. 파운드리 투자를 확대해도 국내 팹리스가 팹 사용 기회를 얻지 못해 해외로 향하는 ‘단절된 산업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이 책은 이러한 불균형의 세 가지 원인으로 메모리 일변도의 편향성,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의 취약성, 파운드리·팹리스·정책 실행 간의 단절을 꼽는다. 진단에만 머물지 않고 MPC(Multi Project Chip) 기반 공통 플랫폼, PDK·설계 자산 표준화, IP 축적 전략 등 실행 가능한 대안을 함께 제시한다. 팹리스가 양산까지 부담해야 하는 고가의 마스크 비용과 반복적 검증 비용은 중소 설계기업에 가장 큰 진입 장벽인데, 설계 자산을 공통 플랫폼으로 공유하면 반복된 실패를 산업 자산으로 전환하면서 이 비용 장벽을 허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제안이다.
책을 쓴 진짜 이유를 묻자 안 저자는 “현장에서 느낀 문제의식을 기록으로 남기고 공유하는 것이 산업을 오래 지켜본 사람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답했다.
특정 기업이나 정책의 책임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성공의 그늘에 가려진 구조적 과제를 차분히 짚고, 후배 세대와 정책을 설계하는 이들에게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자립형 반도체 생태계가 왜 필요한지를 전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차별점으로 저자는 30여 년 메모리 실무와 25년 이상 팹리스 경영이라는 두 시선의 결합, 비판에 머물지 않는 구체적 대안 제시, 데이터에 근거한 구조적 분석을 꼽는다. 전문 용어를 최소화하고 핵심 개념을 반복해 상기시키며 소제목으로 길잡이를 두어 반도체 산업 경험이 없는 독자도 전체 흐름을 따라올 수 있도록 구성한 점도 강점이다.
반도체 산업의 불균형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한국의 비메모리 점유율 3%라는 수치로, 대기업 중심 구조와 단기 성과 평가 체계 속에서 무형 자산 축적이 핵심인 시스템 반도체가 성장하기 어려운 구조적 모순을 이 책은 정면으로 짚는다. 두 공저자가 오래 품어 온 고민이 맞닿아 있음을 확인한 것이 함께 쓰게 된 결정적 계기였으며, 집필 기간은 3개월여였다.
한국과 대만의 위상 역전…30여 년 성공 공식이 미래의 제약이 될 수 있다
안 저자가 가장 상징적인 사례로 드는 것은 한국과 대만의 위상 역전이다. 경제 규모·면적·인구 모두 한국에 못 미치던 대만이 2024년 처음으로 증시 시가총액에서 한국을 추월했고, 그 견인차는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한 TSMC다.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10% 내외인 것과 대조적이다. TSMC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에 따라 설계와 제조가 분업화되어 팹리스·소부장·후공정 기업이 수평으로 연결된 두터운 생태계를 갖추었다. 반면 한국은 자본과 정책·인재가 소수 대기업에 집중된 구조여서 혁신적 팹리스나 독립 파운드리가 성장하기 어렵다. 일본이 제조 중심 구조를 장기간 유지하다가 팹리스·소프트웨어·플랫폼 중심 재편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해 장기 정체에 빠진 사례도 경고음으로 제시된다.
“30여 년간 검증된 메모리 중심 성공 공식이 역설적으로 미래의 제약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짚고 지금부터라도 설계·플랫폼 중심으로의 전환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AI·자율주행·데이터 산업이 확장될수록 시스템 반도체 시장의 중요성과 규모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데, 정작 한국은 이를 감당할 설계·팹리스 생태계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시장은 커지는데 준비는 더딘 이 간극이야말로 저자가 가장 우려하는 미래 반도체 리스크다.
저자는 한국이 나아갈 방향으로 ‘우리 방식의 시스템 반도체 강국’을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핵심은 결국 클러스터와 팹리스, 그리고 사람이다. 출간 후 독자 반응 중 가장 많이 들은 것은 ‘메모리 성공 신화에 너무 익숙했음을 돌아보게 됐다’, ‘제조 강국과 설계 강국은 다르다는 문제의식이 오래 남는다’라는 평이었다. 마침 정부도 비메모리 점유율을 3%에서 10%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중장기 계획과 팹리스 전용 펀드, 공용 설계·테이프아웃 인프라 구축 등을 발표한 시점이어서 이 책이 설계 생태계 강화로 이어지는 논의의 출발점이 되기를 저자는 기대하고 있다.
“과거의 성과는 미래를 위한 소중한 자산이지만, 변화 없이 안주하는 순간 새로운 기회를 놓치거나 영원히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의 독자층은 반도체 관련 대학생·대학원생에서 정책 입안자까지 폭넓게 열려 있다.
“예기치 못한 전환점들이 모여 가장 하고 싶었던 일로 이끌다”
안 저자의 인생 터닝 포인트는 두 번이었다. 첫 번째는 대학원 시절이다.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지만, 취업의 길을 택해야 했고, 바로 그 선택이 메모리 반도체와의 첫 만남으로 이어졌다. 한국 메모리 반도체 산업이 세계 시장에서 막 도약을 시작하던 시기에 그 한복판에 서게 된 것이다. 설계에서 상품기획·마케팅·전략기획까지 사업의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개별 제품이 아니라 산업 전체의 구조와 가치 사슬을 보는 시야를 키울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정년 무렵 연세대학교에서 강의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 전환점들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선택들이 모여, 결국 가장 하고 싶었던 일로 저를 다시 데려다주었습니다.”
인생철학의 나침반은 ‘선을 행하되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는 성경 말씀과 ‘오늘이 나의 가장 젊은 날이다’라는 두 구절이다. 트레킹을 통해 자연 속을 걸으며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건강 비결이라고 전했다.
연세대 겸임교수로서 제조 현장의 감각과 설계·소프트웨어 역량을 함께 갖춘 인재가 자라나는 데 작은 기여라도 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앞으로의 목표다. 설계 역량이라는 무형의 자산은 결국 사람을 통해서만 축적된다. 메모리 강국을 넘어 진짜 반도체 강국으로 가는 길도 결국 사람에서 시작된다는 것, 오늘도 그가 강단에서 다음 세대와 나누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다.
청년 세대에게는 자신의 환경을 비관하기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는 기술 전환의 흐름을 공부하고 준비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그는 강조한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본질을 공부하는 자세야말로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여는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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